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시편 17편 새벽설교

시편에서 다윗이 말하는 구원
말 그대로 행악자들에게서의 구원이기도 하고 상황에서의 구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더 큰 구원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시편17편(psalm 17)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 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주께서 나를 판단하시며 주의 눈으로 공평함을 살피소서
  1.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2.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apple of your eyes)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
  2.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3.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1.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에서 다윗은 악인에게서 구원하여 주실것을 하나님께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하고는 사뭇다른 부분들이 목격된다.
다윗이 하나님께 간구한 구원의 내용을 살펴보고 정말 하나님께 간구했던 다윗의 구원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지 보았으면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할때 우리는 모면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된다.
기도한다는 것 자체로서도 잘 하는 일일테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국에 가서는 내 삶의 안일과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 삶 속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져야 함을 느낄 때가 한 두 번 뿐이었는가?
마찬가지로 여러 신앙인들의 삶을 보노라면 하나님과 교제해 가는 삶 속에서 변화되어 가는 과정들을 보며 깊은 안정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신약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내용을 보아도 내 삶의 문제해결과 돌파와 그들만의 안정을 위한 기도는 없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과 성경이 제시하고 가르치는 내용이 사뭇 다르다. 아니 많이 다르다.

우리는 평안을 안녕을 안정을 간구하지만
성경은 고난을 당하는 믿는자들을 보여주고
어려운 환경 속에 처한 성경의 인물들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7편에서도 다윗의 어려운 상황과 환경의 모면을 추구한 기도 였는지 아니면 다른 기도 였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위대한 신앙이 아니라 다윗을 다윗되게 만드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시편에서
다윗의 간구에는 '구원' 곧, 상황과 환경과 어려움과 압제 속에서의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맞다. 구원을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
그 구원의 호소에 제시되고 있는 다윗의 모습이 우리와 다르다.
다윗처럼 응답받는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국에는 다윗의 기도를 들으셨던 하나님을 알아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자는 것이다.

다윗은 단순히 구원을 위한 기도를 드린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구원자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다.
뒤바꿔서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자신을 그렇게 인간 다윗이 필요할 때만 찾는 그런 하나님이고 싶지 않으셨다. 창세부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고스란히 율법이라는 그릇에 담으셨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하나님의 기준과 가치관과 하나님께 속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다른 제사장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선지자에게 주신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부어주신것이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다윗에게 부어주신 것이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정직은 세상의 가치관에서의 정직이 아니라 주의 말씀을 따르는 의로움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의 의로움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 율법의 말씀 앞에 의로움이 비춰진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2절 주께서 나를 판단하신다. 자신의 기준이 아니라 주의 기준이다. 공평함을 살피소서. 영어성경에는 right 옳음으로 기록된다. 다시말하면 주의 눈으로 의로움을 판단하시라는 말이다. 3절에서 밤에 주님께서 오셔서 살피신대로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만 또는 교만이 아니라 그만큼 여호와의 말씀에 행악자들처럼 자신의 기준을 따라 살지 않았고 하나님의 기준, 그 말씀 기준을 따라 살았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4절에서 나온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지극히 인간적인 상황속에서 본다하더라도 말씀의 기준을 따라 살았고 그 길에서 떠나지 아니했으며 5절 굳게 지키고 실족치 아니했다 합니다.


그러니까 "나를 구원하셔야 할 자격 조건이 되었으니... 나를 구원하소서" 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기준이 되었고 세상의 다른 신들이 아닌 하나님이 구원자 이심을 제가 인정합니다!! 이다.
다윗을 인도하신 이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주시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젊은 시절을 히브루의 삶을 살아갔었지만 결국 그는 왕이 되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가 되는 결과를 갖게 되었다.

기준이 하나님이시고 그 내용도 하나님이시며 그 말씀을 따라 나타나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이 말하는 구원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예전에 개인적이 기도를 할때 이렇게 기도했던 적이 있었다.
'주님! 믿는자가 세상에 목소리를 높이려 하기에 믿는자가 좀 잘 살아야 하겠습니다. 믿는자가 실력이 좀 더 있어야 하겠습니다. 믿는 자가 먼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경적인 기도가 아니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처절한 삶의 압제와 핍박의 현장속에서 무화과의 나무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어지는 절망의 상황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고 고백한 하박국은 다시 무화과가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을 노래한것이 아니라 포도를 수확을 많이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러한 압제와 핍박을 하는 행악자들에게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셔서 그들에게서 구원하실것을 노래하는 하박국 선지자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 만이 우리의 힘이며 능력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또한 말라기 선지자의 외침처럼
말2:3-4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있게 하려 함임 줄을 너희가 알리라.'
말2: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주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세우시길 소원하셨습니다. 그 생명과 평강의 언약은 바로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언약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말씀에서 떠났다는 것이다.

자, 하박국은 여호와 하나님 만을 향한 구원을 '구원'자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체에 두고 있다. 말라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에게 떠난 다는 것이 율법을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곧 마음에 둘만하게 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발로 걷어 찼다.

다시말하자면,
다윗이 간구했던 구원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하고 근거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자신을 죽이려드는 행악자들과 원수들에게서 자신을 구원하여 달라는 다윗의 기도는
단순히 모면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이 옳고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으며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행악자들 앞에서 자신을 구원하여 주사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을 기도하는 것이 다윗이 바란 하나님의 구원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리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후스토 곤잘레스의 교회사를 읽고나면 느꼈던 것 중 가장 큰 것은 교회의 역사는 곧 순교의 역사, 다시말해 피의 역사라는 것이다.
단순히 순교가 고귀하고 순결한것인양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윗 뿐만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속에서 살펴본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그것이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을 역사로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다
잠시잠깐 살다가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 되고 최고의 감격과 감사가 되는
그래서 예배 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찬양 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리의 삶을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앞에 우리를 내어 맡기는 인생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어진 하나님을 알아가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게 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려움을 모면하는 기도가 아니라 행악자들을 이기는 기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우월해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쁨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복음을 지켜내는 즐거움
세상이 감당치 못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행복을 누려가는
이러한 사람이 다윗이었으며 우리들, 곧 그리스도인 입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자신의"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하루입니다.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즐거워 하십시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승리하십시오. 주님께서 곧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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