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역개정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공동번역
야훼여,
내 마음은 교만하지 않으며 내 눈 높은 데를 보지 않사옵니다.
나 거창한 길을 좇지 아니하고 주제넘게 놀라운 일을 꿈꾸지도 않사옵니다.
차라리 내 마음 차분히 가라앉혀,
젖 떨어진 어린 아기, 어미 품에 안긴 듯이 내 마음 평온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야훼께 두어라.
새번역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현대인의성경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나는 교만하거나 거만하지 안흐며 나에게 과분한 일이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니 젖 뗀 아기가 자기 어머니 품에 고요히 누워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히 여호와를 신뢰하라.
NIV
My heart is not proud, O LORD, my eyes are not haughty;
I do not concern myself with great matters or things too wonderful for me.
But I have stilled and quieted my soul; like a weaned child with its mother,
like a weaned child is my soul within me.
O Israel, put your hope in the LORD both now and forevermore.
생각해볼 단어.
겸손
교만하지 아니함
오만하지 아니함
큰 일 감당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하려하지 아니함
내 영혼의 고요와 평온
어미품
젖 뗀 아이
여호와를 바라라
hope
12월이다. 한 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듯하다.
내년이면 서른 아홉이다. 스물아홉에서 서른 너머갈 때의 암담함이 30대 중반에서부터 스물스물 올라온다. 열 아홉에서 스물을 너머설 때는 세상의 모든것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얼른 어른이 되어서 세상과 견주고 싶어 안달이었었다.
생각해보자. 우리가 20대를 맞이하면서 계획했던 대로 이루어 온 사람이 있을까?
또 생각해 보자 우리가 30대로 너머서며 만족할 만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앞으로 40대에도?
그렇다, 장담컨데 인간은 늘 부족함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족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불안하게 바라보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만족을 할 수 없는 존재다. 즉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다.
세상은 그런 부족함을 채우라고 명령한다. 도전이라는 말로 희망이라는 꿈으로 우리들을 쉼없이 달리게 만든다. 마치 경주마처럼 말이다. 그 가운데 아주 잠깐씩 우리에게 당근을 준다. 그리고 채찍질 한다. 아직 부족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 후엔 성취라는 각설탕을 먹여준다. 그리고 그 성취는 이내 허망함으로 다시 도전 하고 다른 목표를 세우게 한다. 그리고는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다 새로운 목표가 세워졌도다! 다시 달리게 만들고 만다.
한 청년이 말한다. 뭐니뭐니 해도 머니가 최고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앙이 좋아도 돈이 없으면 않된다라고...
또 다른 세상의 가치관은 바로 "필요"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다. 먼저는 돈이 부족하다. 돈만 여유롭게 가지고 있었단면 지금의 결핍은 없었을텐데...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지금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희생을 한다. 누구나 다 같은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돈이 더 있었다면 ... 그 때 그 만큼 만 더 여유 있었다면... 이라면서 돈이 없음을 후회하고 우리를 돈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다.
잘 생각해 보자.
과연 우리는 부족과 만족, 도전과 성공의 굴레 안에서 무엇을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과연 만족을 살아가는 존재였던가? 성공을 목표로 이땅에 태어 났던가?
절대 아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각자에게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서 한 사람에 하나씩 위대한 실행 계획을 두고 그 것을 수행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고 수행에 실패한 자에게는 벌울 주시는 하나님이시란 말인가?
우리는 하나님주신 이 인생을 하나님의 가치, 즉 말씀대로 살아가며 우리에게 허락된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을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들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의 대상이 되고 사랑함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가정에서 내가 힘겨운 상황에 있었다. 그래서 밥도 잘 못먹고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한 몇날을 지냈었다.
힘들어하고 있는 나에게 아내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있었다. " 당신이 흔들리면 나도 흔들린다 " 우리 가정은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만족을 따른 가정이 아니라고 호언장담하고 당당하리만큼 자랑스럽게 그렇게 살아갔었었는데 나에게 찾아온 작은 어려움 속에 휘둘리는 가정이 될 판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자. 우리 가정에 우,화가 찾아 온것일까?
아니다. 그러한 일들은 인생속에 언제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가정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 난 것인가?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진정 살아가는 가치관이 다른데 있었다는 것이다.
내 아픔의 치유와 풍성한 만족과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서로 힘이 되고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것에 우리 가정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부족을 채워 만족하는 것에 있는것이 아니다. 도전해서 성취해내는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지금 우리에게 허락된 사람들과 사는 것이다.
시편의 기자는 말한다.
내가 겸손합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지도 내 눈이 오만하지도 않습니다. 라고 자랑하는 바가 아니다. 내가 교만하지도 오만하지도 않다는 것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만이다. 그것이 오만이다. 그렇게만 본다면 이후의 고백은 가관이 되는 것이다. 전혀 인생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이 되고 마니까 말이다. 바로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크고 기이한 일들을 힘쓰지 않는다는 것 말이다.
아까 그 청년이 다시 말한다. "신자들은 세상을 외면하면서 산다. 그래서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고 말만한다. 그러고서는 정작 내가 돈을 벌어오면 내 도움을 요청했다. 신자들은 세상을 외면하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시편 저자는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 청년의 말처럼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자들의 기쁨을 말하는 것일까요? 세상을 외면하면서 살아가는 자들 그들만의 기쁨일까요?
아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교육과 해결방법으로 도전을 시도하고 또 시도하고 또시도해야 하는 것으로만 알아왔다. 그것이 세상의 가치관이다. 그렇다면 시편 기자는 겸손과 오만하지 않음과 자만하지 않음을 내세우며 나태함과 좌절을 포장하고 있다는 것인가?
시편 저자는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니 내 마음이 교만하지도 내 눈이 오만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야 말로 그의 인생의 참 의미인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젖 뗀 아이가 그 어미품에 있는 것 같이 내 영혼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있음을 말이다. 우리의 기쁨은 도전의 성취에도 결핍의 충족에도 있지 않다. 우리의 온전한 기쁨은 우리의 영혼이 고요한 것이며 평온함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는 것이다. 젖을 뗀 아이는 이제 어미의 뱃속에서 나와서 여러가지 낯선 상황들을 해쳐나가고 있는 용사와도 같다. 어린 아이가 자라는 속도는 그 어떤 힘쎈 청년도 따라가지 못한다.
그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젖은 가장 중요한 안식이었다. 젖을 먹으며 어미와 교감하고 안정감을 느낀다. 어미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가게 된다.
젖 뗀 아이라는 단어에 집중을 하다보면 왜 젖 뗀 아이인가? 젖 뗀 아이의 특성을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이것을 인간의 시기(젖뗀아이의 시기, 늦어도 24개월?)적으로 본다면 아이가 중심이 아니라 어미가 중심이 된다. 다시말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상태로 본다면 어미의 품은 언제나 위로와 평안과 안식을 주는 품이다. 걸음마를 걸어야하고 음식도 먹어야 하고 다치기도 하고 옹알옹알 말도해야하고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고 도전해야하고 이루어 내야만하는 일들이 부지기 수 인데 그 아이가 어미 품에 있다. 이것은 그 아이가 그 도전과 수행을 포기했다는 말이 아니다.
엄마가 웃으면 눈앞에 있는 낭떨어지도 건너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아이가 되는 것처럼 우리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기, 걸음마조차도 잘 뗄 수 없는 그런 아이에게 어미는 다시 걸을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는 어미품에 있는 아이처럼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안식처와 힘의 근원이 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어린 아이는 다시 걸음마를 걷고 말도 하고 다시 시도하고 도전해서 그 젖 뗀 아이로서 해야할 일들을 마땅히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젖뗀 아이의 어미와도 같다. 우리의 안식이 되며 우리의 힘이 되고 우리의 위로이시며 우리의 만족이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세상속에서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들로 걸음마를 걷고 이유식을 먹으며 자라나는 것이다.
사랑하는 더 채플 청년 여러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이유는 원대한 계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사랑하고 함께 눈물 흘리고 그들의 필요를 따라 자신을 기쁨으로 즐거이 헌신하는 자들 우리의 마음이 교만하고 우리의 눈이 오만해서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겠노라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호언장담하는 자들로 멋질 것 같게 보여지는 삶이 아니다.
젖 뗀 아이처럼 쓰러졌어도 다시 눈물짜내며 달려가는 그 아이에게만 허락된 품, 그 어머니이신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저와 우리들을 사랑해 주신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안식이며 우리의 만족이고 우리의 필요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시편 기자가 이야기 했던것 처럼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라라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를 바라는 것일까? 영어 성경에 보면 바라라는 표현으로 hope를 사용하고 있다. 단지 희망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여호와를 희망하면 희망대로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의 걸음마는 엄마가 대신 걸어주는 것이 아니고 젖을 뗀 아이를 대신해서 엄마가 다른 음식물을 대신 먹는 것이 아니다. 걸음마도, 말도, 음식섭취도 다 아이가 하는 것이다.
단지 그 아이가 어미에게 바라는 것은 어미의 사랑이다. 관심이다. 즉, 어미와 아이의 관계 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란다는 말도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도하고 찬송하고 반응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땡깡도. 하나님께 감사도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반응하며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로또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그 것이 바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품안에 있어서 그와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말씀에 반응하고 그의 인도하심과 그의 일하심에 사용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더욱더 알아가며 기뻐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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